NOTICE  |  이 블로그는

1.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아버지는 화려하거나 부유하지 않아도 가끔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는 나름 예술가요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인사들이 섞여 있어
그 아이는 그들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기도 할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라 놀림 받지도 않을 것이고
친구들에게 제 부모나 집을 들킬까봐 숨죽일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는 학교 선생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것이며
어쩌면 그 교사는 제 아비의 만화를 인상 깊게 본 기억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간혹 아버지를 선생님 혹은 작가님 드물게는 화백님이라 부르는
번듯하게 입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들 것이고 이런저런 행사에 엄마아빠 손을 잡고 참가하기도 하리라.
집에는 책도 있고 차도 있고 저만을 위한 방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고
고함을 치지도 술에 절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일도 없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최규석 <대한민국 원주민>

2. 팔이 잘려 본 사람은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최규석 <습지생태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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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개의 사람들이 책을 읽진 않지만,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고, 그걸 하나의 강박처럼 달고 살기도 한다. 이것이 단지 강박에 지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략된 채, 제시되는 구태의연한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고독해지고 쓸쓸해진다(어떤 소설에서 그렇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책은 동시에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같이 보면되고, 음악은 같이 들으면 된다. 그렇지만 책만큼은 아니다. 글자가 얼마 없는 동화책은 같이 읽어줄 수 있어도, 하다못해 만화책을 읽더라도 남과 함께 읽으면 왠지 개운하지가 않다. 

책을 통해 얻는 배움이 다른 방식보다 '배움의 본질'에 가깝다는 인식도 의심스럽다. 많은 이들이 책을 통해 얻는 배움보다 직접 체험하면서 얻는 배움이 훨씬 값지다는 것을 안다. 독특한 교육철학으로도 유명했던 루소는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 중 하나만을 택해 가르쳐야 한다면 누굴 택하겠냐'는 질문에 '부잣집 아이를 가르치겠다'고 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 아이는 이미 많은 것을 직접 체험하고 깨우치게 되니 굳이 가르쳐야 한다면 부잣집 아이를 택하겠다'는 것이다. 루소다운 발상이긴 하지만, 이 말에는 책상머리 앞에서 글줄이나 읽으며 얻는 공상적 배움보다 직접적인 체험이 훨씬 값진 배움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쉽게 말해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해커스토익>을 보는 것보다, 직접 미국인과 영어로 말해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너무 앞서 가긴 했지만, 요는 책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유용하지도 않은 데다가 오락거리로써도 미달이며, 지식 습득의 수단으로써도 변변치가 않다는 것.

강유원은 '인류는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가 책을 읽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이에 덧붙여 '위장에 탈이난 사자만이 풀을 먹는 것처럼,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현실 세계에서의 모든 가능성이 박탈되어버린 낙오자만이 세계에 대한 복수심으로 문학에 탐닉한다'는 어떤 평론가의 말도 떠오른다.

2. 여하튼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은 말그대로 강박일 뿐이다. 모든 일이란 게 그렇듯, 독서에도 목적이 분명해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 

여기서 목적이란 일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서를 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 책을 읽음으로써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다. 이것을 혼동함으로써, 많은 이들은 '책을 읽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뭔가를 이뤄냈다는 뿌듯함에 젖어드는데, 엄청난 착각이다.

헌데 요즘에도 독서의 일반적인 목적을 말하며 '독서를 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들이 간혹 있다. 

어떤 책의 홍보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책읽기를 배우지 않으면 밑에서 부려지는 일만 하게 된다!" -이지성(<꿈꾸는 다락방>의 저자라 한다)

성인 대다수의 독서 분야가 이른바 "자기계발서, 성공학, 부자학"에 치중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독서의 일반적인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빡빡한 일상에 쫓겨 매일 같이 "책 좀 읽어야 되는데..."하는 넋두리를 하는 직장인들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선언이다.

이 말은 "위에서 부리는 일을 하고 싶으면 책읽기를 배워라!"라는 뜻과 통한다. 남들 위에 올라서고 싶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호소력이 짙은 선언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상식인 우리 사회에서는 효과적인 협박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책을 읽어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3. 독서에 일반적인 목적이란 없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은 쓸데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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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9년 서울시에서 발간한 문건에 나타난 예산 편성 기준

전현직 장차관(급), 전현직 대학총장(급), 전현직 국회의원, 대기업 총수(회장), 기타 이에 준하는 사회저명인사 - 1시간당 220,000원(초과 매시간당130,000원)

단순인건비 - 1인/1일 30,000원

-존귀한 분들을 제대로 대우할 줄 아는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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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 법칙에 의하여 빈부의 차가 매우 커져 있으니...혹은 4~5인의 가족으로써 수백 평의 장대한 주택을 점유한 자도 있고 혹은 5~6인, 7~8인의 가족이 단칸방에서 살아 나가는 자가 있으며, 혹은 그에게도 불급하는 바가 되어 변지邊地 산록에다 토막을 쌓고 수류獸類의 생활을 흉내내는 자가 있으니 일부 부자의 주택이 크고 넓어질수록 전시의 주택난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요컨대 주택이 부족하니 借家가 태부족이요, 차가가 태부족이니 가세는 가주의 폭리책으로 인하여 높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높은 가세를 소수입자로는 부담할 수가 없으니 토막수가 불어나는 것은 자연적일 것이다. ...시내의 교통이 편리한 지점에는 주택이 점차로 개량되나 이는 모두 지방에서 올라오는 지주 부호 또는 세가주들이 독점하는 것이 되고, 그곳에서 몰리어 나가는 차가인들은 교통이 불편하나마 집세가 헐한 변방으로 모이지만 주택이 워낙 부족한지라 얻어들 곳이 없다. ...그에 대하여 총독부와 경성부에서는 어떠한 주택 공급책도 있지 못할 터이니 이에 산록에 토막 수가 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요, ...집이 적을수록 그 투하자본에 대한 세율은 더욱 높아 있으니 이는 큰 집에 비하여 수삼 배나 높은 것이다." -<한국주거의 사회사> 124쪽

일제강점기의 주택난을 설명하는 <신동아>의 기사라 한다. 거주할 곳이 없는 영세민, 빈민들은 "남의 집 더부살이인 '행랑살이'"를 했다 하는데, 이것은 조선시대의 노비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노비만 못하다. 노비들은 동거하는 집의 가사만 도우면 됐지만, 행랑살이를 사는 이들은 행랑채에 얹어사는 것에 대해 그 집의 가사일을 돕고 따로 자신의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가 행상과 품팔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랑살이조차도 못하는 이들은 거리로 나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 '토막살이'를 했다. '토막'이란 흙으로 벽을 적당히 만든 후 얼기설기 지붕을 얹은 일종의 간이 주택이다. 토막민들은 도시의 극빈층이었고 도심 접근성이 좋은 시 외곽에 집중 분포되었다. 주로 묘지나 유곽, 화장장 부근, 강바닥이나 다리 밑에 자리 잡았다. '토막민'에 대한 경성부의 정의가 재미있다. '토막민:하천 부지나 임야 등 관유지, 사유지를 무단 점거하여 거주하는 자', 이는 요즘 철거민들이나 노점상들을 규제하는 행정관청의 태도와 아주 유사하다. 위 기사는 불균등한 분배를 지적하고 있는데 '토막민'을 '수류의 생활을 흉내내는 자'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또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자본주의 법칙'에 대한 시각이다. 이 기사를 쓴 이는 '자본주의 법칙은 빈부의 차이를 더욱 크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125쪽

"1936년 4월 경성시가지계획의 시행에 따라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원래 이들 토막민들의 이주 지역으로 예정되었던 곳이 신시가지 개발지구로 편입되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따라 신속히 시가지를 정리하기 위해 시 당국은 신편입 지구에 정착해 있던 토막들을 강제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쫓겨나는 이들에 대한 대책이 수립되기도 전에 본격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의 공사가 시행되면서 신당정과 신설정 등에서 대규모 철거가 강행된 것이다. 이 강제 철거에 맞서 토막민들은 진정, 시위, 철거 방해 등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128쪽

토막민은 오늘날의 철거민들의 선조였다. 2008년 지금도 야산의 적당히 고른 땅에 형성된 달동네, 도심 외곽에 형성된 판자촌에는 수십년을 살고 있는 "불법 점거자"들이 많다. 이러한 이들은 여러 개발사업에 떠밀려 터전을 잃고 외곽에 분포하게 된다. 이런 '불법 점거자'들은 각종 공공개발사업에 방해가 되며, 토지소유주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한 것도 모자라 거기에 불법구조물까지 세워 선량한 시민의 재산권을 심대하게 침해한다. 하지만 자비로운 행정관청과 토지소유주들은 이들에게 이주비까지 쥐어져 가며 이전을 종용하지만, 이들은 그 몇 배의 웃돈을 요구하며 버티는 아주 악질적인 범법자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토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연물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용인될 수 없는 상황이다(간혹 어떤 이들은 이런 범법자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보며 이런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해주던 박정희나 전두환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꼭 이해못할 것도 없는데, 여기에는 '상품'과 '소유' 그리고 '공공재'와 '점유'에 대한 명확한 경계설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2. 경찰발표로 본 용산참사

3. 정의의 명백한 왜곡과 법의 뻔뻔한 곡해를 통해서 일부 사람들 또는 일단의 사람들의 폭력을 옹호하고 위법행위를 면책함으로써 적절한 치유책이 부정되는 곳에서는 전쟁상태가 아닌 다른 어떤 상태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어디서든 폭력이 사용되고 침해가 일어나면, 비록 그 일이 정의를 시행하도록 임명된 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할지라도 엄연히 그것은 폭력이자 침해이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가 비록 법률의 이름, 명분, 형태하에 일어났다 할지라도 법의 목적은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견 없이 적용됨으로써 무고한 자를 보호하고 보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작업이 성의 있게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고통을 겪는 자는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며, 그들은 지상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호소할 데가 없다. 그러한 경우에 그들은 하늘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 -존 로크 <통치론> 20절

-하늘에 호소하라는 것은 전쟁 상태에 임하고 자신의 운명을 신께 맡긴다는 뜻으로 보인다. 즉 법 혹은 사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결단하고 행동한다는 것.
-변화의 조짐

4. "꼭 지가만을 수익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익우선의 감정이다. 자신이 납부하는 부담금에 의해 도시민 전체가 얻게 될 교통상, 위생상, 도시의 번영상 얻을 수 있는 수익을 공익적 견지에서 생각해야 한다."(1942)

-경성시가지계획에 대한 부담금 징수에 불만을 품은 토지 소유주에 대한 경성부 토목과장의 답변. 전근대적 조선에 자본주의를 이식하던 식민 관료의 발언치고는 놀랍다. 그러나 식민정부의 도시계획이 불어넣은 '개발붐'은 토지 소유주들에게 토지의 소유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자신들의 사유지를 불법 점유하고 있던 '토막민'을 몰아내고 '토막집'을 강제철거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도시계획이 본격화하면서 강제철거가 빈번해지자, 철거민들은 경성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한 경성부의 답변은 "딱한 사정은 알겠으나 도시계획상 어쩔 수 없다"였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토막민들의 저항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국(사)유지의 불법점유자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고, 소유권 행사를 하는 지주 앞에서, 도시계획을 집행하는 권력 앞에서 저항의 한계는 분명했다. 모든 철거는 '적법과 불법'의 구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시가지계획의 시행은 어떤 이유에서든 빈민 주거를 박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도시계획의 필연적인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염복규 <서울은 어떻게 계획되었는가> 65쪽

5. 세상은 얼마나 변했을까? 헌재의 결정 때까지는 기다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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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거 때까지 결코 잊지 않으마

James라는 이가 "x새끼에겐 매가 약이다'라는 말이 박정희의 말과 겹쳐진다며  찝찝함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겹침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정서가 동일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여기에는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전제가 깔린다). 파시즘이 현실화되는 것은 분열된 개인이 몰계급적, 몰정치적 정서 하에서 통합된 국민을 형성할 때이다. 여기에는 차분하고 냉정한 분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직 어떤 대상에 대한 동일한 정서를 공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만이 중요하게 된다.

여기서 '매'라는 것이 단순히 '선거를 통한 심판'에 대한 메타포라면 심각하게 순진한 것이다. 선거는 한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예측불가능한 변수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배출하고고 싶었던 것이라면 네티즌들의 재치를 배울 필요가 있다.
"경찰버스로 둘러싸 아늑해? 물대포 맞아 시원하단 사람도..."

어쨌거나 살벌한 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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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족 제도에 대한 회의가 깊어가던 차에 <똥파리>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의 주요한 테마는 가족과 폭력이다. 영화 포스터에 붙어 있는 카피는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이다. 이 카피 속에 나타난 가족에 대한 비유를 통해 우리는 가족에 대한 허구적 관념을 볼 수가 있다. '가족=핏줄', 즉 가족은 어떤 환원불가능하고 대체할 수 없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관계라는 관념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 남기 위해 마지막까지 사수해야 하는 핏줄과도 같이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은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여동생을 잃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버지를 증오한다. 어른이 된 상훈은 가끔씩 아버지를 찾아가 죽도록 팬다. 이와 동시에 잘 알지도 못했던 배다른 누나에게는 생활비를 보낸다.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상훈은 연희라는 여고생과 형인이라는 조카와 함께 해괴한 가족의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편안함에 기대어 그는 '가족'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용서할 계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상훈은 또 다른 가족의 상훈이라고 할 수 있는 '영재'라는 이에게 살해된다. 영화의 결말은 아이러니하다. 상훈의 죽음에 의해 남은 가족들은 편안하고 따뜻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상훈의 자리에는 영재가 대신 남아 있다. 이것을 통해 '가족은 구성원의 자기부정과 희생을 통해 유지된다'라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상훈과 영재는 각각 그들 자신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누군가의 동생이다. 영화는 이들이 그러한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종일관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상훈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상훈이 가족에 투항하여 안정적이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변화를 통해 가족들에게 이용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족이 숨기고 있는 냉정함의 한 면이기도 하다. 구성원은 구성체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야 존속된다. 상훈의 가족에게 그것은 타인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다. 이제 그 폭력은 영재에게 위임된다.

3. 누나는 상훈에게 "그래도 가족이잖니"라 말하고, 고아였던 만식은 "난 그런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족은 바로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부여되고,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민족이 하나의 상상적 공동체인 것처럼 가족 역시 인위적으로 구성한 공동체일 뿐이다. 여기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4.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또하나의 중요한 모티브인 폭력 역시 가족과 무관하지 않다. 가족 내 폭력이 가족 안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권력과 위계를 나타낸다면, 가족 외에서 행해지는 폭력은 가족을 위해서 정당화된다.

넓게 보면 가족은 하나의 목적이며 폭력은 그 수단이다. 여기에 '세상이 엿같이 느껴지는 사람'에게 가족은 더 아프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첨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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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지에 도둑, 성폭행범 누명 "살인보다 끔찍한 테러"

-익명 횡포 고발 기사에 들끓는 익명들. 기사의 리드처럼 "익명 뒤에 숨은 폭력이 한국 사회 곳곳을 멍들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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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문과와 불문과를 합쳐 EU 문화정보학과를 만들었습니다. 

-무자비한 시장법칙에서 그나마 다행인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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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참조글:신경민 앵커 교체, 당연한 결정이다.

1. 하민혁은 애매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 예가 "신경민 앵커의 멘트가 불편하다"라는 표현이다. '불편하다'는 말은 단순히 몸이나 마음이 편치 않다는 정서적 표현, 그 멘트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 '클로징멘트'라는 행위가 부당하다는 주장을 완곡하게 전하는 표현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전체를 읽어 볼 때 하민혁은 세번째의 의미로 '불편하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그 이유로 "신경민의 생각이 내 생각과 너무나 다르다"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두번째의 의미로 사용된 '불편함'의 근거에 해당된다). '불편하다'라는 의미를 위의 세가지 차원에서 명확히 구분짓고 논의하지 않음으로 인해, 해괴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야기하는 소모적 논쟁의 효과는 논점을 여러 가지로 나눔으로써 '앵커 교체'라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결국에는 그 사건을 반대하는 주장들을 적당하게 무마한다는 것이다)

'불편하다'라는 의미를 위에서 말한 세 가지중에서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논의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번째 의미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반응'만을 표현한 것이므로, 개인적인 심리 상태에 대한 대화, 혹은 그러한 심리적 사실들에 대한 나열들로 논의가 진행된다. 두번째 의미는 '신경민 앵커가 행한 멘트의 내용'만을 분석하여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에 논의가 한정된다. 세번째 의미는 '멘트라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따지는 것에 논의가 한정된다.

하지만 하민혁은 그런 차원을 구분하지 않고 마구 뒤섞어 씀으로써 불필요한 언쟁을 야기하고 있다. 다만 그가 글의 말미에 "신경민이 논평코너를 맡거나 정치판으로 가서 자기 주장을 맘껏 펼치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한 것을 볼 때, 그는 '행위의 정당성' 즉 세 번째의 의미에서 '불편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2. '불편함'이란 말의 세 번째 의미에 기반하여 하민혁이 제시하는 '불편함'의 적절성을 따져 보자.

첫째 이유는 따져볼 가치가 없다. 앵커가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면 신경민의 클로징 멘트라는 행위는 정당화된다. 하민혁은 여기서 '나와는 너무 다른 자신의 생각'이라며 불편함을 호소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불편함'의 두번째와 세번째 의미를 모호하게 뒤섞음으로써 성립되는 해괴한 논리다.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의견표명에 있어서 그 내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이지 의견표명이라는 행위를 문제삼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 역시 따져볼 가치가 없다. '신경민 방식의 클로징멘트가 독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인데, 그가 말하는 '독'의 정체는 전혀 설명되지 않고 있으며 단지 '독'이라는 비유를 통해서만 그것이 치명적인 해악을 주는 행위인 것처럼 과장되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클로징멘트가 "달콤한 사탕발림'에 불과한 것처럼, 자신의 생각과 불일치하는 클로징멘트는 "쓰디쓴 약"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야만 비유에 균형이 맞는다.

하민혁이 전개하는 논리의 해괴함을 따라가다 보면 어이가 없다. 첫째 이유와 둘째 이유는 사실상 연결되고 있으며, 둘째 이유는 자신의 첫째 이유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민혁의 주장-나는 신경민의 클로징멘트가 불편하며 앵커교체는 합당하다-나와는 너무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나와 똑같은 생각이라도 그것이 언젠가 독이 될 수 있으므로 그것도 반대한다(이는 마치 공명정대한 태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의 의견과 같은 클로징멘트도 반대하겠느냐'는 반론을 피하기 위해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그는 신경민의 멘트에 담긴 내용이 불편했던 것임을 첫째 이유로 솔직하게 제시하고 나서 둘째 이유를 통해 마치 멘트의 형식이 문제인 것처럼 포장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그가 왜 '불편하다'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는지 그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이어서 하민혁은 '탄압'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사상의 처벌이나 사적이고 집단적인 린치만이 탄압이 아니다.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것 역시 '탄압'에 포함될 수 있다. 이미 가지고 있던 의견 표명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 역시 그렇다.

3. 나는 저 글을 신경민 앵커 마지막 클로징멘트와 민주통신이라는 글을 통해 보게 되었으며 시간이 아깝다는 것에 동감한다. 진심으로 그렇다. 정말 무의미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계속되고 있다.

4. 그러나 http://blog.mintong.org/473 여기에 담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공영방송의 메인뉴스 클로징멘트로 날릴 권리는 없다"는 언급에는 유효한 논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하려면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과 그 한계에 대한 명확한 설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쉽지만 하민혁이 그럴만한 '개념'을 갖추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인의 글에서도 '자유의 한계'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다. 이로 인해 개인적 견해를 담은 클로징멘트를 할 자유와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칠 자유가 별로 달갑지 않은 기준에 의해 허용되거나 금지되고 있다. 그 기준은 "MBC의 정식앵커"라는 공식적 자격과 "분별력 있는 사람의 글"이라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이러한 기준은 다음과 같은 반문을 불러 일으킨다. 공중파를 통한 공식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의 자기주장은 제한되어야 하는가?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주장이 공중파에서 유통되는 것을 제한해야 하는가? 분별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것은 너무나 복잡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나로서는 고민할 엄두를 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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